망가진 모습을 모으고 추억을 다듬는
재영 책수선
2022년 2월 1일
추억의 흔적을 수집하고, 기억을 다듬고 정돈하는 직업이 있다고 하면 왠지 꿈속에 존재할 것만 같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현실에 있다. 망가진 책을 고치는 책 수선가. 어릴 적 친구처럼 보던 책부터 축구 구단의 역사를 담은 책, 좋아하는 이의 사인이 담긴 포스터까지. 재영 책수선은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고 있다. 추위가 조금은 느슨해진 날, 여러 사연과 흔적이 다듬어지는 그 공간, 연남동 작업실에서 재영 책수선과 이야기를 나눴다.


‘책 수선가’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책 수선은 말 그대로 망가진 책을 고치는 일인데요. ‘수선’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지만 가장 정확한 명칭은 ‘지류 책 보존가’예요. 망가진 종이를 다루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책 수선을 시작하신 계기가 궁금해요.
처음부터 책 수선을 하기 위해 공부한 건 아니었어요, 원래 순수 미술(Fine art)과 디자인 그래픽을 전공했어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서 대학원을 진학하게 됐고, 거기서 세부 전공으로 페이퍼 메이킹을 선택했어요. 전혀 다른 분야여서 기본 지식이나 손기술 등이 많이 부족한 상태였죠. 당시 지도 교수님께서 관련 지식과 기술을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일이 책을 수선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다니던 학교 내에 지류 보존 연구실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 취직해 일을 배우며 책 수선을 시작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개인 작업실을 여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통 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면 걱정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저는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이 일을 어느 정도 배웠다는 자신이 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제일 재미있게 하는 일이었고요. 그래서 약간 무턱대고 도전했죠. ‘안되면 다시 돌아오지, 뭐’ 이런 마음으로요.


책 수선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책 수선이라고 하면 보통 많은 분이 수선된 후의 모습에 집중하세요. ‘이 책이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하고요. 사실 저는 수선 전 상태에 집중하거든요. 파손된 책들이 주는 매력이 있어요. 우리가 일상에서 망가진 책을 볼 일이 생각보다 흔치 않거든요. 망가졌다고 해봤자 모서리가 조금 찍힌 정도이거나 손때가 탄 게 전부이죠. 책 수선가로 일하면서 보게 된 책들은 망가진 형태와 이유가 너무나 다양했어요. 도서관 연구실에서 근무할 때는 논문부터 전 세계의 희귀 서적까지 장르도 정말 다양했고요. 그 다양한 게 다양한 모습으로 파손이 됐으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렇게 처음에는 파손된 외형에 끌렸어요. 이어서 망가지게 된 이유에도 매력을 느꼈어요. 보통 책이 심하게 망가지려면 특정한 독서 습관이 있거나 절대적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모습들에 경외감이 들기도 해요.

책 수선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나요?
아무래도 관찰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어떤 책이든 먼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 넘겨보며 꼼꼼하게 살펴봐요. 그게 제일 중요한 과정이에요. 어떤 한 부분이 망가진 것 때문에 의뢰가 들어와도, 정말 그 부분만 고치면 해결될 일인지 아니면 실제로는 더 큰 문제가 있어서 파손이 생긴 건지 판단해야 하거든요. 그 후에 수선 방향을 제안해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앞 커버부터 뒷 커버까지, 한 장 한 장 다 살펴보는 일을 가장 먼저 해요. 처음에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뒤늦게 수습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고, 수선 방향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요.

책 수선의 과정에서 가장 힘든 작업은 어떤 건가요?
매 순간이 어려워요. 많은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서요. 책 자체로만 놓고 보면, 아무래도 오래돼서 상태가 많이 안 좋은 책일수록 작업이 까다롭고 어렵죠. 그 외에는 작업물을 촬영하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사진을 전공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망가진 책에서 느끼는 매력들을 잘 담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요.


반대로 가장 즐기면서 하는 작업은 무엇인가요?
책을 분해하고 해체하는 일이 정말 재미있어요. 제일 좋아하는 과정이기도 해요. 수선과 다른 의미로 쾌감을 느끼는 단계예요. 완벽하게 마무리된 작업이 손에 딱 들어왔을 때 드는 쾌감도 크죠.

한 권의 수선을 마무리하기까지 보통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나요?
책마다 너무 달라서 평균적으로 얼마나 걸린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운데요. 빨리 끝낼 수 있는 작업은 일주일 정도가 걸리기도 하고, 가장 오래 걸렸던 작업은 한 권에만 매달렸는데도 4개월 이상이 걸린 적도 있어요.

어떤 책이었나요?
축구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600년 역사를 담은 책이었어요. 리미티드 에디션이라 전 세계에 9,500부 한정으로 출판됐고, 한 권 가격이 660만 원을 넘을 정도예요. 가로, 세로가 각 60cm에 두께도 800페이지가 넘었어요. 성인 3명이 들어야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고요. 게다가 심하게 망가져 있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다 고쳐야 했어요. 800페이지를 10번 이상은 넘겨봤던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어떤 것인가요?
사실 각각의 스토리가 다 기억에 남아요. 그래도 하나를 꼽자면, 아무래도 첫 의뢰자분이 기억에 많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전까지 저는 도서관에 소속된 직원으로 장서들만 다루다 보니 책 한 권에 대한 사연을 접하거나 감정적으로 얽힐 일은 없었죠. 그런데 작업실을 열고 처음 개인 의뢰를 진행하면서 ‘앞으로 내가 책을 고친다는 게 어떤 의미겠구나’를 알게 됐어요. 마침 또 귀한 사연이 있는 책이었거든요. 대형 국어사전을 맡기셨는데, 어렸을 때 놀 거리가 없어서 사전을 찾아보며 노셨대요. 삽화도 뒤적이면서요. 망가진 책이 말끔해진 걸 보고 어릴 때 친구가 돌아온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확 와닿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추억이나 기억까지 신경 쓰며 다듬어야 하는 일이구나’를 그때 깨달았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흔적이나 파손이 있다면요?
도서관 연구실에서 일할 때인데요.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책은 기본적으로 낙서를 하면 안 되고, 혹시 낙서가 있더라도 심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한 책이 거의 모든 문장에 형광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고, 각주가 적혀 있었어요. 장난을 친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어떤 생각을 남겨둔 거였어요. 보통 그런 책이 발견되면 도서관에서는 폐기 처분을 하거든요. 어떻게 복구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어떻게 도서관 책을 이렇게 봤지’ 하고 화가 나면서도 ‘이 정도면 예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메모와 흔적들을 남겨둔 게 기억에 남아요. 당시 제 상사분도 비슷하게 느끼셨는지, 결국 그 책을 소장하시더라고요. 제가 더 빨리 찾았어야 하는데. (웃음) 그 흔적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소장하고 있는 책을 직접 수선한 적도 있으신가요?
아니요. 저는 책이 망가져도 고치지 않아요. 아무래도 망가진 책의 모습들을 모으는 사람이다 보니까 굳이 고쳐야 하나, 수선의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하고요. 깨끗한 책보다는 망가진 책에서 더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편이에요.

최근 출간하신 도서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에서 찢어진 책을 테이프로 붙이는 것은 금물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어요.
책을 고치기 위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아무래도 테이프죠. 금물이라고 하기엔 전제가 하나 붙는데, 본인이 아끼는 책일 경우예요. 대충 봐도 되거나 애착이 없는 책이라면 찢어졌을 땐 테이프로 붙이는 게 제일 쉽죠. 얼마든지 하셔도 돼요. 그렇지만 도서관의 책이나 빌린 책, 본인이 정말 아끼는 책이라면 오래오래 깨끗하게 보기 위해 테이프는 되도록 안 쓰시는 게 좋습니다.

그럼 아끼는 책을 오랫동안 훼손하지 않고 보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전시를 하듯 보관하면 영원하긴 하겠죠. (웃음) 일반적으로 집에서 소장하는 거라면 생각보다 통풍이 굉장히 중요해요. 식물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대신 식물은 해를 많이 봐야 하지만, 책은 해를 보면 안 되고요. 통풍이 안 되거나 고온이라면 책에 벌레가 생기기도 쉬워요. 평소에 먼지 제거도 잘 해야죠. 요즘 책들은 퀄리티가 상당히 좋기 때문에 그 정도만 유의하시면 될 것 같아요.


개인 작업실을 운영하시면서 책 수선 외에 힘드신 점이 있다면요?
기관에 소속된 직원으로서 책 수선만 하면 되던 때와 달리 지금은 책을 고치는 일 외에도 홍보와 재무, 청소, 재료 준비까지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해서 본업이 여러 가지로 늘어났어요. 처음에는 적응이 많이 힘들었어요. 적응한 뒤에는 의뢰자분과 책 수선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어렵다고 느껴요. 대부분은 애착이나 어떤 추억이 있는 책들을 가지고 오시니까요. 굳이 고치면서까지 소장하고 싶은 귀한 책인 거잖아요. 저도 그만큼 의뢰자분의 감정에 공감하고 엮여야 더 좋은 수선 방향을 제안해드릴 수 있으니까, 그 부분이 항상 어렵죠.

책 수선가로서 목표는 무엇인가요?
2018년에 작업실을 처음 열고 이 질문을 받았을 땐 당장 1년 뒤에도 계속 일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답했어요. 멀리 내다볼 여유가 없었죠. 지금은 조금 더 멀리 보고 있긴 한데요. 저는 책 수선이라는 일이 기술직에만 한정되지 않으면 좋겠어요. 기술에만 갇혀버리면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이 좁아지기도 하고, 제가 발전하고 작업이 확장될 가능성도 줄어든다고 생각하거든요. 꼭 책 수선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접점이 있는 다른 분야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의뢰받은 책 수선의 모습만 보여드렸다면, 이젠 개인 작업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 중이에요.
CREDIT
취재 김혜정 기자
사진 재영 책수선 제공

#김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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